후기-책-정의(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

2021. 8. 21. 21:30각 작품 후기(책/게임/영화/음식 등)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원제: 해야 할 옳은 일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다.

정의(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는 같은 내용을 좀 더 다듬어 다시 나온 책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름이 유명하다보니, 도서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두 권이나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빌려가 있었고, 똑같은 내용인 이 책은 남아있었다.

 

지금 검색해보고 알게 되었는데, 강의 영상이 있다. 영상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이쪽을 보면 되겠다.

한국어 자막까지 달려 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ZMpiyMmLgiMCxIlHxAA6-g0aVzaxQIHk 

 

마이클 센델 - 정의

 

www.youtube.com

 

먼저 쓴, 돼지가 철학에 빠진 날 후기에서 내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혔다.

 

이 책은 맨 처음에 트롤리 딜레마부터 제시한다.

그런 흥미로운 걸 제시하면서 '이건 필리파 풋이 얘기한 겁니다'라는 말을 안 해서 10년 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 나는 샌델이 생각해낸 것인 줄 알았다.(이 점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중 하나)

아니더라.

유명한 사고실험이고, 인터넷에서 밈이 되어 굉장히 많은 패러디가 만들어져 있기까지 했다.

 

선로를 조작해 1명을 죽이겠다는 응답이 다수,

선로를 바꾸지 않겠다는 응답이 소수.

뚱뚱한 남자를 밀어 죽이겠다는 응답은 소수,

밀지 않겠다는 응답이 다수.

 

이 둘이 모순적이지 않냐는 물음을 던지는 사고실험이지.

 

나는, 다른 조건은 없다고 가정하면 두 경우 모두 부작위를 선택할 테지만

구체적인 다른 조건에 따라 선택을 달리 할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전자와 후자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어도 그것이 모순되지 않는 일관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자세히는 적지 않겠다. 내가 생각한 내용이랑 비슷한 내용을 이미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기도 하고,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반감을 가질 수 있으니까.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겠다는 응답에 대해 샌델은 '결과론적 도덕 추론이다. 공리주의의 입장이다.',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응답에 대해 샌델은 '정언적 도덕 추론이다. 칸트의 입장이다.'

라고 한다.

이런 부분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양한 생각의 경로가 있을 수 있는데 너무 단순하게 나누고 섣불리 단정짓는다. 

전자의 응답자도 공리주의가 아니라 다른 사상적 바탕으로 그 응답을 한 것일 수 있다.

후자의 응답자도 결과론적으로 생각해 다른 이유로 그 응답을 선택했을 여지가 있다.

후자의 응답을 한 응답자가 칸트의 입장과는 견해가 다를 수도 있다.

 

샌델은 자꾸 학생의 말을 끊고 비아냥대면서 자기가 몰고 싶은대로 모는 것 같는 모습들이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치사해보였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생은 그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건가요?(학생들 웃음)", "여긴 민주주의 사회인데요.(학생들 웃음)", "잠시 제가 민주주의를 변호해도 될까요?(학생들 웃음)"

 

「돼지가 철학의 빠진 날」의 경우에는 분명하게 나뉜 두 입장을 제시하고, 주장'마다' 그에 대한 반박을 바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인 甲과, 甲의 주장에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인 乙이 등장해

甲이 논거 A를 들어 얘기하면 乙은 그에 반박하는 B를 들고,

이어서 甲은 B에 반박하는 C를 들고, 이런 식이다.

반면 샌델 교수의 정의에서는

甲 학생이 A를 얘기하고, 乙 학생이 B를 얘기하고, 丙 학생이 C를 얘기한다.

B가 꼭 A를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샌델은 '다른 의견인 학생 없나요?' 하고 물어본다.

끝내 甲이 얘기한 A에 대해서는 그 A가 타당한지 타당하지 않은지 따져지지 않는다.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가 많았다.

이러니 책을 읽고 마치 화장실에 다녀와서 처리를 확실히 하지 못하고 온 느낌이 든다.

 

그리고 샌델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우리가 무심코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는 학문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흔히들 하는 변명이 회의주의이다. 회의주의란 이런 것이다. 

"로크, 칸트조차도 못 푼 문제를 우리가 이 강당에서 토론한들 어찌 해결할 수 있겠어. 논의는 허사야, 불필요해."

내가 알기론 회의주의는 저런 게 아니다.

감각 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저런 건 패배주의 같은 것이 아닌가.

하버드 유명 교수가 회의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엉터리로 설명한다고?

모욕해서 죄송합니다, 샌델 교수님.

 

이 책에서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현대 국가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3가지'라고 제시하는 것들이 있다.

1. 온정주의적 입법(안전띠 착용 강요 등)

2. 도덕적 입법(동성애 금지 등)

3. 부의 인위적인 재분배

 

안전띠 착용 강제는 당사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피해자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된 주변인들까지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이유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는... 그 주제로 따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글을 쓰면 괜히 적을 많이 만들겠지.

 

자유주의자 노직은 "재산을 뺏는 것은(부의 인위적인 재분배는) 징용과 같다"고 했다고 한다. 소득을 노동으로 얻으니까.

그런데 근로소득이 아닌 소득도 세상에는 많다.

 

대리 출산 이야기에서 엘리자베스 앤더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리 출산은 아이와의 유대감을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소외된 노동이 된다. 효용 외에도 다른 것들의 가치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다른 온갖 것들이 다 고려되어 아우러진 게 바로 효용이다.

 

거스름돈 정직하게 돌려 주기 이야기에서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 자신의 이익이라는 잘못된 이유로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고 한다.

이게 맞나?

내가 알기론 칸트의 사상대로라면 "거스름돈을 옳게 돌려준 행위를, '거스름돈을 옳게 돌려주는 것이 옳기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했을 것 같은데.

'다른 이유로 한 것이야 아니냐'가 중요하지, '자신의 이익을 좇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칸트의 사상에서 이건 중요한 문제다. 이걸 샌델 교수는 대강 그게 그거라는 식으로 말한 거라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책에 따르면 칸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호도성 진실을 말하는 것과는 다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보았다는데,

정말 그랬다면 칸트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깨달음이 부족했다고 보인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나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속이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참고

https://namu.wiki/w/%EA%B1%B0%EC%A7%93%EB%A7%90%EC%9D%80%20%ED%95%98%EC%A7%80%20%EC%95%8A%EB%8A%94%EB%8B%A4

 

책 맨 뒤 해제에서 김선욱 교수는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라고 하는데

아니다, 내가 보기엔.

공리주의 입장에서도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죽인다는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답이 나오려면 우선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된다'가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회에서 '무고한 사람들 죽여도 된다'가 받아들여진다면 사회 구성원들이 다수가 큰 불안을 느낄 것이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큰 불안을 느끼는 것은 사회의 효용을 크게 깎는 것이.

 

공리주의에 대해서라면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아니니 여기까지 하겠다.

 

만족도: 5/10